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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별

#6

24.10.03

22년도 7월에 PKD를 진단받았을 때 달리의 신장은 이미 7~80%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고, 23년도 12월에 이미 신장 전체가 기포로 덮였으며 신부전 3기였다. 그 사진을 봤을 때는 정말이지 절망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어언 10개월…

한달 전만 해도 상태가 괜찮아 우리는 태교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달리는 지난 10일동안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속도로 상태가 나빠졌다. 그 짧은 기간동안 이미 고양이로써의 특성은 전부 잃어버렸고, 생명체로써의 특성을 하나 둘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생명체의 graceful shutdown 을 보고 있다.

한 침대에서 같이 자기 서비스 종료, 장난감에 반응하기 서비스 종료, 그루밍 시스템 종료, 하악질 시스템 종료, 퇴근하면 마중나오기 서비스 종료, 점프 시스템이 종료되어 이미 고양이로써의 서비스는 끝이 났다. (신기하게도 아직 꼬리탁탁 시스템은 제대로 동작중이다.)

스스로 밥먹기 시스템 또한 이미 종료됐고, 물마시기 시스템과 츄르에 반응하기 시스템이 현재 종료중에 있다. 문헌에 따르면 이 다음에는 화장실 시스템이 종료된다고 한다. 그리고는..

밥먹기 서비스가 종료되었으므로 우리는 주사기를 통해 강급을 하고 있다. 또한 심각한 구내염으로 인해 고약한 썩은내가 나는 침이 폭포처럼 흘러 두어시간에 한번씩 닦아줘야 한다. 달리는 냄새핑~
그루밍 시스템도 종료되어 온몸의 털은 푸석푸석하고 침이 흘러 뭉쳐있다.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해 그냥 물앞에 앉아서 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할때도 많다.

진단 후 2년 넘게 신혼여행도 포기하고 어디 외박하러 가지도 않은 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약과 밥을 챙겨주었던 나날들… 왜 신혼여행을 가지 않냐는 질문에 “고양이 때문에” 라고 말하면 이해를 받지 못해 “그냥..” 이라고 대답하던 나날들. 진이와 나는 그리하여 굉장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지만, 잘 못해줬다는 것에 대한 미련은 없다. 그 상태로 이정도까지 퀄리티 있는 삶을 살았으니 말이야.

다른 장수하는 고양이에 비하면 절반도 못살다 가지만, 단명하는 고양이에 비하면 두배는 더 살다 가는 것이다. 게다가 다른 모든 고양이보다 너댓배는 더 귀여웠으니, 짧고 굵은 생의 표본이라 할 수 있곘다.
우리가 젊을 때 가는 것이 낫다. 어찌되었건 생명체는 쇠한다. 그걸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떠나간 자를 불쌍히 여기지 말라. 남겨진 자를 불쌍히 여겨라. 우리는 달리를 추모하고, 우리와 가지를 위해 기도해야한다. 아멘

24.10.07

사흘 전에는 물그릇에서 물의 수위를 찾지 못해 앞발을 전체를 담궜다가 꺼내기를 반복하였으나, 물은 마시지 못하고 그루밍도 못해 발이 계속 젖은 채로 있었다. 그루밍을 못하고 눈코입에서는 분비물이 잔뜩 나와 얼굴이 말이 아니다. 보이는 대로 닦아주고는 있으나..

이틀 전에는 자꾸 인간 화장실에 들어가려 하길래 몇번 들여보내 줬으나, 별다른 행위는 하지 않았다. 화장실 앞에서 문열어달라고 두어번 엄청 크게 울었으나, 그게 끝이었다. 이날부터는 구강에서 똥냄새가 아니라 생선썩은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오늘부터는 꼬리탁탁을 제외한 모든 시스템과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주사기로 공급된 식사 소화하기 서비스, 물마시기 시스템, 츄르에 반응하기 시스템이 종료됐다. 귀와 발바닥도 차갑다. 아마 체온조절 시스템이 종료되는 중인듯하다. 워낙에 깔끔떠는 녀석이어서 그런가, 배변실수는 하지 않는다. 나올것도 없지만..

그동안 지켜보기가 너무나 안쓰럽고 힘들었으나, 이제는 그런것도 없다. 아무 행위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깔아준 헌옷 위에서 그저 누워서 숨쉬며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다.
정말 놀랍게도, 그 모습마저 너무나 귀엽다.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에 더 많은 동정을 받을 수 있는게 자못 내키지 않지만, 본능은 어쩔수가 없다.

24.10.08

자고 일어났더니 작은방 옷장 앞에서 밤을 지낸 듯 했다. 원래 있던 구석에 깔아둔 배변패드에서 소량의 소변이 발견되었다. 지가 싸놓고 다른곳으로 도망친 듯 하다. 귀여운것..!

그리고는 컴퓨터방 구석까지 힘겹게 걸어와 누웠다. 그늘지고 어두운 곳에 있고싶어 하는 듯 했으나, 날이 너무 맑고 햇살이 좋아 달리가 항상 즐겼던 거실 햇살 아래로 옮겨주었다. 그랬더니 창문 앞 구석에 똑같이 쓰러져 숨을 가쁘게 쉬었다.

이때부터는 달리가 언제 무지개다리를 건너갈 지 알 수가 없어, 나는 일하는 와중에 유진이는 베개를 달리 옆에 두고 누워 쓰다듬으며 같이 시간을 보냈다.

여러번의 회의가 끝나고 일곱 시 쯤 배달을 시켜 달리 옆에서 밥을 먹는 와중에, 한 입 먹고 달리를 살피기를 반복했던 유진이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달리가 숨을 안쉬는 것 같아

달리는 19시 33분 두번의 큰 날숨을 힘들게 내뱉고 유진이와 내 쓰다듬을 받으며 조용히 고양이별로 떠났다.

24.10.09

달리가 고양이별로 떠난 후에 남은 달리 껍데기를 우리는 잘 닦고 쓰다듬어주었다. 그간 힘겨운 시간을 보내 얼굴이 말이 아니었지만 잘 닦고 거즈를 물려주었더니 예전의 미모가 나오는듯해서 기분이 다소 나아졌다.

달리를 옆에 두고 밤을 지냈다. 지난 1주일간 달리가 걱정되어 밤에 잠을 잘 못자고, 아침에도 심장이 벌컥벌컥 뛰는 상태로 깨어 달리를 찾았으나, 이 날 아침에는 유난히 편안하게 일어났다.

유진이와 처형과 함께 달리를 안고 경기 광주에 위치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화장을 위해 간단한 염습을 하고, 나중에 고양이별에서 우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다리에 붉은 실을 우리의 머리카락과 함께 묶어서 뉘여주었다.

불타고 남은 달리는 참.. 가녀리다고 생각했다. 작은 몸으로 자기 신장이랑 싸우느라 참 고생이 많았다. 모두들 자기 자신과 싸우는구나.

달리는 그리하여, 영혼은 행복이 가득한 고양이별로 먼저 떠나 우리를 기다리고, 병든 신체는 자연으로 보내버리고, 부드러운 하얀 가루가 되어 내 책상 위에 놓이게 됐다.

난 32년을 살았고, 달리와 함께 6년을 살았으니 따지고보면 달리와 함께한 인생은 20퍼센트도 안된다. 그러나 달리가 없는 삶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너무… 힘들다고 할 수 있겠다.

금방 적응이 되겠지. 인생이란 항상 그래왔다.